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프 톨스토이 (문단 편집) === 회심(回心) === <안나 카레니나>를 쓰고 있던 해에 톨스토이는 갑자기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자녀 세 명과 소중한 친척 두 명('숙모' 타티아나와 고모 알렉산드라)을 잃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도덕적 자기 점검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고통스런 물음을 <고백>(1879)이라는 에세이에서 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정신적 위기와 함께 급격하게 변화했다. '예술은 인생의 거울이다. 인생이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되었을 때, 이미 거울의 유희는 흥미를 끌지 못한다'고 하여 마침내 예술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철학이나 과학도 삶과 죽음의 문제에 해답을 내려주지 못했다. 절망하고 괴로워하는 톨스토이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어준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 살아간다는 민중의 소박한 신앙이었다. 톨스토이는 [[정교회|러시아 정교]]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사형제와 전쟁을 공공연히 긍정하고 다른 종파를 증오하는 정교회의 모습을 톨스토이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신의 [[교회]] 사상을 발전시켜 <신의 왕국은 그대 안에 있다>(1894)라는 에세이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톨스토이는 그 에세이에서 어떤 폭력이나 무력의 사용은 해로운 것이며 [[폭력]]에는 [[비폭력]]으로 맞서야 하고 정부로 대표되는 무력이나 [[종교]], [[사유재산]], 맹세 등 모든 형태의 강제적인 힘에 반대하는 사상을 펼쳤다. 인간의 이성은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진리를 알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고 또 인간의 유일한 이성적 활동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는 후세에 '톨스토이주의'라는 사상 형태로 발전했다. 종교와 일치하는 삶에 강한 열정을 느낀 톨스토이는 거름통을 들면서, '''나도 [[농부]]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할 정도로 농민들의 생활을 동경했던지라 <인생론>, <참회록>을 저술하고 스스로 재산과 영지를 포기하고 농부처럼 일하는 금욕적인 삶을 선택했다. 부인 소피야는 농민으로 돌아가겠다는 톨스토이의 폭탄선언을 듣자 톨스토이와 대판 다투고 만다. 물론 톨스토이 개인에게 있어서는 분명 고뇌에 찬 결단이겠지만 이제껏 [[귀족]]으로 살아 온 소피야에게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고매한 이상이라 하더라도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구나 [[소작]]농들도 톨스토이를 비웃었다(...). 톨스토이는 1881년 이전에 쓴 모든 소설의 [[저작권]]을 소피야에게 양도했지만 소피야의 화는 풀리지 않았다. 톨스토이는 에세이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에서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비롯해 회심하기 전에 쓴 모든 작품을 부정했다(!).[* 정확히는 모든 작품은 아니고 '''단편 딱 두 개'''만 '이 정도가 그나마 턱걸이다'라는 뉘앙스로 남겼다.] 이 글에서 톨스토이는 모든 예술은 사람들의 윤리적인 교화를 도와 사람들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또한 예술이 가진 사상은 어떤 무지한 사람에게라도 전파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기준에 따라 톨스토이는 이전에 쓴 자신의 모든 작품들이 보통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헛된 목적으로 쓴 '귀족의 예술'이라고 [[흑역사]] 취급했다. 일상생활에서도 자신의 손자가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있는 걸 보고 '왜 좀더 유익한 책을 읽지 않고 그런 쓸모없는 책을 읽느냐'고 했을 정도였다. 이 에세이는 러시아 문학계에 엄청난 파장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